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모리아 왕조 (문단 편집) === [[미하일 3세]](842~867) === 842년 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모친 [[테오도라(9세기)|테오도라]], 환관 테옥티스도스의 섭정을 받았다. 테오도라는 843년 3월 초 공의회를 소집해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성상 파괴주의 단죄를 재차 추인했다. 이리하여 [[성상 파괴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아랍을 상대로 공세를 연이어 펼쳐 큰 성과를 거뒀으며, 경제 정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어 막대한 금을 확보해 국고를 가득 채웠다. 다만 [[파울리키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해, 그들이 멜리테네의 아랍 세력과 손을 잡고 제국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855년 15살이 된 미하일 3세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테오도라의 오빠 [[바르다스]]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테옥티스토스를 죽이고 어머니를 수도원에 보냈다. 비록 어머니를 유폐하고 단독 황제로 등극하긴 했지만, 미하일 3세는 아직 15살의 소년이었고, 책임감이 결여되어 통치는 뒷전이고 향락을 추구했기 때문에 실권은 바르다스에게 주어졌다. 바르다스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정치적 식견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갖췄으며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다. 856년 파울리키아파를 등에 업고 쳐들어온 멜리테네의 아미르 오마르 이븐 아브둘라를 주살하였고, 아미다를 공략하였다. 859년 미하일 3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라센에 타격을 입혔고, 제국 함대가 다미에타를 습격하여 많은 포로를 확보했다. 863년, 루스인과 아랍인이 침공했지만 제국군은 이를 격퇴하고 아랍군 사령관들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제국군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몰아붙여 필리포폴리스, 메셈브리아 등을 수복했다. 한편, 바르다스는 미하일 3세의 동의를 받아 친교황파인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를 해임하고, 중립적인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이 일은 서방 교회와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그나티오스는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도움을 호소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863년에 포티오스를 파문했다. 미하일 3세는 이에 맞서 867년 포티오스와 다른 세 명의 동방 주교들을 소집해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했다.([[포티오스 분열]]) 이러한 분열의 와중에 두 교회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에 대한 사목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모라비아에 파견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키릴 문자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라비아는 서방 교회를 택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하일은 가뭄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보리스 1세]]를 굴복시키고 동방 교회로 개종시켰다. 866년, 미하일 3세는 친구 [[바실리오스 1세|바실리오스]]와 힘을 합쳐 바르다스를 죽였다. 그 후 정사를 바실리오스에게 떠맡기고 향락에 빠졌다가, 867년 9월 24일 바실리오스와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아모리아 왕조는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의 제2의 전성기를 이끌 [[마케도니아 왕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